우선 가타부타 덧붙일 것 없이, 흔하지 않고 매우 좋습니다.
저한테는 숙성이다 뭐다 필요없이 처음부터 취향이었어요.

미카로카의 전체적인 무드가 물을 많이 먹인 수채화 같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쏘리,쟈스민은 농도가 있습니다. 두 겹 겹쳐 칠한 수채화같이. 그래서 왠지 다른 향수에 비해 착향 시간이 더 긴 것 같아요. 발향도 좋구요. 과일과 꽃, 보통이라면 유화로 그렸을 향조를 수채화로 두 겹 덧칠하는데서 그친 덕에 자칫하면 무거울 수 있는 향이 마법처럼 그렇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사실 다 필요없고.. 쏘리 쟈스민을 즐기는 동안 드는 생각은 하나였습니다
[ 와.. 이거 중경삼림이다.. ]
영화 중경삼림을 모티브로 삼았다는 말을 세번쯤은 찾아본 것 같아요.
반환을 앞둔 홍콩의 밤, 어딘지 모르게 들떠있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그 밤 어딘가를 뚝 잘라 만든 향기 같이 느껴졌거든요.

가장 독특한 사랑 이야기라고 평가받는 중경삼림은 그 시절 홍콩의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벌어지는 두 개의 사랑 이야기를 병렬적으로 나열하죠.
그 중 첫 번째가 임청하, 금성무의 이야기. 가장 유명한 대사 중 하나는 물론,
" 파인애플 좋아해요? "
입니다.

사귀던 연인에게 소위 잠수이별을 당한 그 날. 하필 만우절이라 이를 믿을 수 없던 금성무는 그로부터 한 달후인 5월 1일자의 파인애플 통조림을 찾아 다닙니다. 하루에 한 캔씩 그 통조림을 먹어치우고, 그 갯수가 30개에 달하면 깔끔히 이별을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이었죠. 결국 5월 1일은 오고, 울리지 않는 연인의 전화를 쳐다보던 금성무는 유통기한이 두 시간 남은 파인애플 통조림 수십개를 먹어치웁니다.

쏘리, 쟈스민의 첫인상은 통조림에 담긴 듯한 달큰한 파인애플이었습니다.
사람에 따라 쨍하게 느껴질 순 있지만, 마냥 상큼 발랄하진 않은 것 같아요.
그렇다고 쨈같이 녹녹하고 걸쭉하지도 않습니다. 금성무 또한 새로운 사랑을 찾은 것처럼요. 정말로 달짝지근한 파인애플이 여름 밤, 선선한 해변가 같은 농도로 임팩트있지만 거부감 없이 다가옵니다.

그렇게 1부의 이야기는 막을 내리고, 이야기는 어느덧 양조위와 왕페이의 "쟈스민" 으로 접어들죠.

쟈스민으로 넘어오면서 영화도, 향수도 진가를 발합니다. 쟈스민은 파인애플보단 비밀스럽고, 그렇기에 신비로워요. 극 중에서 왕페이는 짝사랑하는 양조위에게 과일 바구니 심부름을 하며 우연인 척 부딪힙니다. 솔직히 밤이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저는 이 장면이 그렇게 향수의 전체적 무드와 잘 어울렸네요.

사랑이 저물어가는 것보단 피어오르는 향이에요. 우연인척, 모르는 척, 어머 미안-!! 동그랗게 눈을 뜨며 모른 척 웃는 걸 알아도 속아주고 싶게 만드는 매력적인 향.
영화의 메가히트 주제곡인 "캘리포니아 드림" 역시 제목만 들어도 쏘리, 쟈스민과 너무나 잘 어울리죠? ㅎㅎ

덥지만 답답하지 않고, 달큰하고 예쁘지만 마냥 쉽진 않습니다. 과일 바구니 틈새에 끼여 있는 듯 하다가, 꽃비누 언저리에서 녹아내리는 중이기도 하고. 이렇게 모든 향조가 느껴지는 향수는 오랜만이면서도, 각각의 향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어 오히려 재밌습니다.

제게 있어 외국영화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여름마다 꼭 한 번씩은 찾아보는 영화인데 공간에 쏘리, 쟈스민을 가득 담고 다시 보니 정말 새로워요. 쏘리,쟈스민은 물론 미카로카의 앞으로의 모든 향을 찾을 것 같습니다.